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주 이씨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청주 이씨 시조 이능희(李能希)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(壁上三韓)[* [[신흥사]] 공신당에 초상화가 걸린 공신.] 삼중대광(三重大匡)[* 고려의 문산계 정1품.] [[태사]](太師)를 지냈다. 그의 선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. 《청주이씨족보(淸州李氏族譜)》에 보면 태사공 이능희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전한다. 청주 이씨 가문 출신인 이자림은 고려 수도 개경의 [[나성]]을 축조하여 개성현 [[백작|개국백]] 작위를 받았다. 또한 국성을 하사받아 [[왕가도]]로 개명하였다. 왕가도의 두 딸들은 고려국왕과 결혼해 각각 원질귀비[* [[현종(고려)|현종]]의 귀비.], 경목현비[* [[덕종(고려)|덕종]]의 현비.]가 되었다. 이능희의 10세손 이계감(李季瑊)은 낭성군(郎城君)에 봉해졌고, 13세손 이애(李薆 : 李佇)가 정사좌명공신(定社佐命功臣)으로 상당부원군(上黨府院君)에 봉해졌다.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. 그런데 《관북파보(關北派譜)》(丁酉譜)의 서문에 6세 문정공(文貞公) 이공승(李公升)의 둘째 아들 평장공(平章公) 이계장(李桂長)이 입북 세거하여 청주이씨 관북파가 생겼다고 하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.[* 모순되는 건 아닌 게 애초에 고려 초기는 호족연합체제였기에 중앙에서 작호나 작위를 내릴 때도 유력 [[호족(한국사)]]들의 경우 근거지나 연고지의 지명에 근거해 내렸다. 즉 고려 초기에 등장하는 성씨들은 거의 본관이 되는 지역에 영지급으로 세력을 구축해놓은 상태였다는 것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